<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
At the same time, we can see beyond our fingertips
송유경 개인전
스페이스 어반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1길 3-2)
2023.01.18 – 2023.01.31
11 : 00 -19 : 00 (휴무일 없음)
<연계 프로그램>
풍경을 나누는 다과회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 -퍼포먼스
-회화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이므로 더욱더 회화를 지속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이번 전시는 신작인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 2022 퍼포먼스와 <우리가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을까?>2023 영상 작업의 프로토
타입을 선보이며, 그동안 작업해 온 대표작들과 드로잉, 작업 노트를 전시한다.
현시점에서 풍경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절대 같은 풍경을 볼 수 없는 우리가 어떤 경관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통해 정치성 상황
속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는 소수자들을 떠올린다. 첫번째로 가장 중요한 일은 항상 정해져 있고, 소수자들은 항상 되묻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같은 풍경을 통해서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절대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연결되는 상
상을 하며 연대의 마음을 다잡는 시도를 한다. 또한 퍼포먼스,나레이션, 영상, 3D 와 같은 다양한 시도를 해오면서 그림을 계속 그리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나를 포함하여 아무도 그림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그림과 다른 작품들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새로운 기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도 이 또한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AI가 그림을 더욱 잘 그리는 시대일 수록 바보 같은 행위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언어가 없었기 때문에 괴로워하던 과거를 떠올리곤 한다. 추상적인 것을 만지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알고자 하고, 또한 이를 구체화
하면서 나의 첫 질문을 되돌아본다. 원래 내가 알고 싶었던 원본이 무엇인가. 우리는 추상과 구상 그 사이 속에서 갈등하며 질문을 해나가며 서로의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것 같다. 경계를 그리고 또 그 경계를 바꿔 그리고 언어를 만들고 또 그 언어를 다시 만든다. 느리게 회화를 통해서 나의 언어와 행위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명료하고 간편하고, 자극적인 것만이 살아남는 세계 속에서 매체 사이를 오가며 경계를 움직이고 싶다.
1.
<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망태할아범과 망태할아범과 망태할아범>
<구멍에 닿지 않는 한 걸음>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퍼포먼스 기록영상
2.
<우리가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을까?>
3.
<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4.
<식>
5.
<구멍에 닿지 않는 한 걸음>
6.
<드로잉과 작업노트>
<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1-1.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단채널비디오, 컬러, 사운드, 12분33초, 2022
3.나는 너였을 때를 기억해,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45x47cm, 2022
3.우리의 발들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천에 아크릴, 과슈,236x163cm, 2022
3.그리고 그 몸을 어디로든 옮길 수 있는 상상,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33.5×24.5 cm, 2022
3.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캔버스에 아크릴, 밀가루, 본드, 117×79.5cm, 2022
안양에는 할아버지 나무와 할머니 나무인 수호신들이 있다. 과거에 미군이 나무를 자르자, 불이 났고 그 이후 더욱 잘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마을의 구전 설화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자연이 몰고 온 역병에 대해 생각한다. 나무를 자른다는 행위는 단지 그뿐
이 아닌 것 같다.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닐까? 우리 동네에는 아직도 나무의 신과 우물의 신과,
바위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에게 형식적인 제의는 지내나, 실제로 이들을 믿는 이는 적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접촉 할 수 없기에 임
종을 함께 하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 마주하며 이를 나무와 교차시킨다. 나는 너였었고, 동시에 나무였었다. 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서로에게 수호신이 될 수 있다는 상상을 시도해본다.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갈 때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의 생명이 꺼져 갈 때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말라고, 다시는 동물로 태어나지 말라고. 아무 존재가 되지 않는 세계. 다시는 사람이 되지 말고 동물이 되지 말고 생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떠나는 이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우리는 서로에게 수호신이 되고 우리는 서로에게 수호신이
되고 이윽고 수호신이 사라진 세계.
출연,연출 | 송유경, 유지영, 장윤석
촬영감독 | 김태경
목소리 | 김태경, 송유경, 유지영, 장윤석
사진 기록 | 김태경, 박규리, 송유경
<망태할아범과 망태할아범과 망태할아범>
1-2. 망태할아범과 망태할아범과 망태할아범,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8분37초, 2020-2022
“이놈! 너 말 안 들으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 어릴 적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망태 할아버지는 누구인가? 옛날 옛적부터 엄마 말
안 듣고 거짓말하면 망태 할아버지가 소록도로 잡아간다고 했다. 도깨비 , 혼불, 유령보다 더욱 무서운 존재가 바로 망태 할아버지다. 그
는 도시의 부랑자인가, 전염병 보균자인가? 예산 대흥에는 망태 할아버지 석상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망태 할아버지를 수호신으로 삼고,
역병을 물리치고 재난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달라고 매년 2월 제사를 지낸다. 망태 할아버지의 기원을 추적해가며, 기원이 불분명한 망태
할아버지를 숭배하는 민간신앙의 흔적을 통해 근대의 ‘위생’과 ‘규율’ 등 도시 발전으로 인해 추방당한 존재들을 생각해본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코로나가 우한으로 부터 왔다, 아시안이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코로나 환자가 어느 장소로 이동했
했는지 경로를 추적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았으며, 다시는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망태할아
버지는 정말 과거에 옛날 옛적에 존재하던 존재인가?
<구멍에 닿지 않는 한 걸음>
1-3.구멍에 닿지 않는 한 걸음, 퍼포먼스 기록영상 짧은 버젼, 1분53초, 2018
5.신의 아이들, 캔버스에 유채, 91x65cm, 2017
5.구멍의 아이들, 캔버스의 아크릴, 23.5×33, 2017
5.소리없는 날, 캔버스에 아크릴, 스프레이, 45.5x33cm, 2018
5.나날, 캔버스에 아크릴, 116.5x80cm, 2017
5.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는 일, 혼합재료, 33×45.5cm, 2018
5.솟아난 교실, 캔버스에 유채, 29.34.5cm, 2018
5.세 번째 날, 혼합재료, 46x40cm, 2018
5.다락방, 캔버스에 유채, 53×45.5cm, 2017
5.나날, 캔버스의 아크릴, 49.5×60.5cm, 2017
5.구멍에 닿지 않는 한 걸음, 캔버스에 유채, 80x117cm, 2018
5.태초의 알, 캔버스에 유채, 20.5x40cm, 2017
5.포, 혼합매체, 27x19cm, 2017
5.구부러진 이빨, 혼합매체, 22x16x9cm, 2018
5.마지막 순간에 계속 엉겨 붙어 있어, 캔버스에 유채, 27×18.5cm, 2017
5.사건, 혼합매체, 15.5×22.5cm,2018
90년대생의 여성작가인 본인은 인구 산아 제한 정책(아이를 많이 낳지 않기 운동, 특히 여자 아기는 낙태시키던)이 있던 시대에 태어
난 여자 아기였다. 태어나지 못한 아기들은 혼들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 있을 것 만 같다. 당시 낙태 당했던 아기들을 기리고자 한다.
오늘날은 반대로 아이를 많이 낳도록 유도하고 있다. 어떤 때는 낳지 않도록, 어떤 때는 낳도록 아기를 낳는 도구로써 여성의 신체를 강요
하는 시스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나는 낙태를 할 자유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시대에 따라서 달리 주장하며, 또 상황에
따라 변모되는 이야기를 잘 귀 기울이며 두 가지의 의견을 동시에 제시해야한다. 때로는 웅얼거리자. 때로는 크게 주장하자.
회화와 관람객 앞에서 코스튬을 입은 몸으로 웅얼거리며 시를 읊는다.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
0-1.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_프로토타입, 퍼포먼스, 20분, 2022
1-4.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_프로토 타입, 퍼포먼스 기록영상, 5분30초, 2022
문득 길거리에 있는 의자의 위치가 궁금해졌다. 의자들은 어떤 경관을 함께 바라보기 위해 그 자리에 있을까? 우리는 이 의자에 앉아서
함께 경관을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 어떤 경관을 함께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 다른 장소에 앉아서 어떤 경관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까. 핸드폰을 통해서 어디서든 관람을 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함께 다른 풍경과 다른 몸을 가지고 같은 풍경을 보고 있다는 상상, 혹은 풍경을
언어로 공유함으로 인해 같이 볼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다.
목소리 | 송유경, 장윤석
기술도움 | 다이애나 밴드
<풍경을 나누는 다과회>
0-2. 풍경을 나누는 다과회, 퍼포먼스,낭독, 2시간, 2023
동시에 손끝 너머를 볼 수 있어 퍼포먼스의 연계 행사이다. ‘말’로 통해 공유할 수 있는 풍경을 함께 나누고 그 풍경을 낭독하고 음식을 나
눠 먹는 자리이다. 본인은 지난 전시를 통해 전시가 끝나고 나누는 대화의 힘이 있으며, 이 공동체를 지속해보고자 마음 먹었다.
<우리가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을까?>
2. 우리가 풍경을 함께 볼 수 있을까?, 단채널 비디오,컬러, 1분 53초, 2023
일상의 풍경인 스냅사진들을 통해 작가의 찰나의 시선들을 공유하고, 이 일상에 같이 존재하는 지연되고, 반복되는 상황들에 대해 고민
한다.
<식>
4.식, 텍스트, 2019-2023
4.식, 캔버스에 아크릴, 각 20cm, 2019
4.식, 캔버스에 아크릴, 91x65cm, 2019
4.식, 캔버스에 아크릴, 60.5×49.5cm, 2019
4.식, 캔버스에 아크릴, 40.5x53cm, 2019
4.식, 캔버스에 아크릴, 40×29.5cm, 2019
4.식, 캔버스에 아크릴, 22×27.5cm, 2019
4.식, 캔버스에 아크릴, 72.5x53cm, 2019
4.식, 캔버스에 유채, 41x53cm, 2016
할아버지는 투병을 하시다가 입원해 계시던 병원 바로 아래 장례식장에 들어가셨다. 상복을 입은 사람과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함께
산책하는 길은 이상하게 느껴진다. 애도의 장소는 사라지고 병원에서 바로 장례식장으로 신속하게 연결되어 처리해주는 것이 편리하지
만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개인적 경험으로 목격한 죽음과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장례 문화를 생각해본다. 죽음마저도 상품으로 만
들어 파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까?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기록영상을 제작했으나 글을 정리하며 재창작
을 시도하고 있다.